칼


"젊어서 《난중일기》라는 이순신의 글을 읽기도 했지만, 늙어서 현충사에 가서 이순신의 칼을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칼의 노래》라는 졸작 소설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소설이 졸문이건 오문이건 간에 그나마 문체의 힘을 버티어낼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현충사에 실물로 전시되어 있는 그 칼의 힘이다. 그 칼은, 단 한 번 베이고 지나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고 손 댈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일회성의 운명을 가르쳐주었다. 삶의 순간들도 그와 같아서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다시는 거스를 수 없는 일회성의 칼로 인간을 내리찍는 것이리라. 나는 내 문장이, 한 번 베이고 지나가서 끝나는 일회성의 칼이기를 바랐다."
- 김훈: 강물이나 바람, 노을의 어휘 몇 개. 실린 곳: 김훈 외: 《소설가로 산다는 것》. 문학사상 2011, 82-95쪽, 인용은 89쪽.
2013년 겨울에 《칼의 노래》를 읽은 후 오랜만에 다시 김훈의 소설들을 읽었다. 《현의 노래》 《남한산성》 《공무도하》 《내 젊은 날의 숲》 ... 그 독서의 연장선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것》에 실린 김훈의 위의 글을 발견했다. 그리고 《현의 노래》 책머리에는 "삼 년 전 겨울, 나는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이순신의 칼을 들여다보면서 한 계절을 보냈다."라는 문장이 있다. 아, 《칼의 노래》는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의 칼을 들여다보면서 쓴 것이었구나. 그리하여 내가 현충사에 그 칼을 보러 간 것은 2015년 2월 14일이었다. 서늘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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