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입니다

글번호 574
작성자 파공
작성일 2017-09-13 11:53
첨부#1 _mg_4513_mir_ec82acebb3b8.jpg (621KB) (Down:61)
추천: 0  조회: 144      
사진 '찍기'와 '쏘기'



우리말에서는 사진을 ‘찍는다’, ‘박는다’ 등으로 표현한다. ‘찍다’, ‘박다’ 등의 동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독일어에서는 ‘사진 Foto’을 목적어로 하여 ‘machen 만들다’, ‘schießen 쏘다’ 등의 동사를 사용한다. 물론 우리말의 ‘촬영하다’에 해당하는 ‘aufnehmen’이라는 동사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쏘다’이다.

‘쏘다’로 번역되는 독일어의 ‘schießen’이나 영어의 ‘shoot’이 사진을 찍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통용되는 것은 대상을 향해서 셔터를 누르는 동작이 목표물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동작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식과 결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진은 대상의 이미지를 얻는다. 이미지는 그 어원이 의미하듯 실체가 아닌 허상이다. 사진은 대상으로부터 그 허상, 즉 이미지를 찍은 또는 박은 것이다. 한자로 표현하면 그림자(影)를 잡은(撮) 것, 즉 촬영한 것이 사진이다. 허상을 찍었거나 박았거나 잡았을 뿐이니 대상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사진으로 인해 대상이 달라지거나 죽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롤랑 바르트의 사진과 죽음에 관한 사유는 사진으로 인한 대상의 죽음이 아니라 시간의 경과로 인한 대상의 소멸에 관한 것이다. 그 소멸은 사실 사진과 무관하다. 사진에 찍히지 않아도 모든 존재는 시시각각 소멸되어 간다. 롤랑 바르트가 주목한 것은 사진이 그 시시각각의 한 각(刻)을 찍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쏘는’ 행위는 다르다. 대상, 그 존재에 직접 개입한다. 실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허상을 잡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잡는다. 그것이 사냥이라면 사냥물은 죽는다. 과녁을 쏘는 경우에도 과녁은 허상이 아니라 실체이다. 쏘인 대상은 어떻게든 고유의 형태를 잃고 손상되거나 파괴된다. 죽음이다. 그 죽음은 ‘쏜’ 행위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방식과 결과에서 ‘쏘다’는 ‘찍다’ 또는 ‘박다’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쏘다’라는 표현을 사진에 사용하는 것은 대상을 향해서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이는, 숨마저 멈춘 상태에서의 그 정중동 행위의 공통점에만 과도하게 주목한 결과이다. 그런데 사진을 ‘쏘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다. 나무를 자르고 꽃을 꺾으며 사진을 무도하게 ‘쏘는’ 사람들. 쏘여야 할 사람들.

나는 찍으려고 했을 뿐인데 쏘려는 것으로 오해를 했는지 화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던 그 사람. 그는 지금 그 자리에 없다. 어디에선가 소멸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소멸되어 가고 있다. 롤랑 바르트를 읽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빔 벤더스는 “카메라는 존재의 숙명, 즉 그 소멸에 저항하는 무기이다.”라고 말한다. 나의 무기를 열심히 잘 사용해야겠다. 그런데 나의 소멸에 저항하려면 자화상을 많이 찍어야 하나?
  0
359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580 흑고양이 파공 2018-11-22 9
579 상실화(喪失花) 파공 2018-10-02 36
578 Net 독일어 한마디 파공 2018-05-23 796
577 사진으로 읽는 베를린 파공 2018-01-15 125
576 2018년 무술년 파공 2017-12-31 116
575 가을 파공 2017-11-19 106
574 사진 '찍기'와 '쏘기' 파공 2017-09-13 144
573 자오선 파공 2017-07-17 156
572 기다림 파공 2017-05-07 198
571 실종 파공 2017-03-04 210
570 기억 [1] 파공 2015-12-06 431
569 시월의 마지막 밤 파공 2015-10-31 367
568 한겨레 신문에 투고한 사진과 글 파공 2015-10-21 491
567 가을... 가냘픈 몸부림 파공 2015-09-25 356
566 눈의 물 파공 2015-09-24 282
565 손길 파공 2015-07-31 354
564 물의 몸서리 파공 2015-07-12 491
563 헉! 파공 2015-07-06 373
562 자랑 [3]+1 파공 2015-05-29 388
561 Neigung 파공 2015-05-15 400
560 희망 파공 2015-04-30 519
559 소식 파공 2015-03-08 498
558 파공 2015-03-03 1788
557 파란 파공 2015-02-02 447
556 손흥민 독일어 인터뷰 파공 2015-01-27 821
555 크리스마스 노래들 파공 2014-12-10 557
554 우주가 피어 있었다... 파공 2014-10-03 732
553 《Net 기초 독일어》 출간! [1]+1 파공 2014-08-30 1555
552 왕초보를 위한 Net 기초 독일어 출간 예고 [1]+1 파공 2014-08-23 2007
551 숨바꼭질 [1] 파공 2014-05-25 625
123456789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