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화(喪失花)

오랜만에 카메라를 들고 꽃무릇을 찾아 나섰다. 꽃무릇은 흔히 상사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사화와 꽃무릇은 모두 수선화과에 속하는 꽃이지만 꽃 모양은 전혀 다르다. 공통점은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꽃무릇도 상사화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상사화는 봄에 돋은 잎이 여름이 되어 다 말라 떨어진 다음에 꽃대가 자라서 그 끝에 꽃이 피고, 꽃무릇은 9월에 꽃이 먼저 피고 꽃이 떨어진 다음에 잎이 돋는다. 그렇게 상사화와 꽃무릇의 잎과 꽃은 생성 시기가 달라 서로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서로 볼 수 없어 그리워하는 것이 잎과 꽃뿐이랴. 같은 꽃이라도 늦게 지는 꽃은 먼저 진 꽃을 보지 못하니, 그 슬픔은 잎과 꽃이 서로 못 보는 안타까움보다 더할 것이다. 생성의 시기가 같은데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해서 못 보는 것이니까.
문득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던 월명사의 <제망매가> 한 구절이 생각난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 모르는구나”.
먼저 진 꽃 주변에 늦게까지 피어 있는 꽃무릇은 상사화(相思花)가 아니라 상실화(喪失花)라고 불러야 할까. 숙살의 기운이 시나브로 천지를 덮기 시작하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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